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서브메뉴 바로가기

정책

정신건강복지법 체험수기 공모전 수상작

[가작] 내가 원하는 목표를 만들어가는 나의 삶

  • 작성일2017-07-14 10:04
  • 조회수394
  • 수상자김O연

<내가 원하는 목표를 만들어가는 나의 삶>

처음 지인으로 부터 이 공모전 얘기를 듣고 마감 이틀 전인데,
잠깐 생각 했다. 내 경험이나 지식들이 사회에 도움이 될지.
결론은 ‘도움이 된다.’ 였다.
그래서 조금 써 보기로 결정했다.
먼저 나는 나이40의 노총각이다.

작년에 서울에서 연고 없는 제주도로 이사 와서 정착중이다.
그리고 내 병명은 ‘인격장애’ 이다.
근본적 문제점은 애정결핍인 부분이 큰 것 같다.
그리고 허리 디스크는 덤으로 있다.
약은 의사 얘기로는 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심리적인 부분에서 아직 필요한 것 같아서 최소량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내 목표를 가지고 영어공부를 하며,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창문청소를 하러 다닌다.
과거 얘기를 하자면 참 굴곡이 많았던 것 같다.

유년시절 농구를 좋아해서 친구들과 어울린 것이 제일 재밌었지만 정서적인 문제와 왜소한 체격으로 힘이 센 아이들에게 돈도 빼앗기고 심부름도 했었다.
부모님은 자주 폭력을 쓰며 싸워서 정서적으로 좋지 않았었고,
그럭저럭 지방대를 다니다 군대도 다녀왔다. 심한 우울증이 있던 상태라 군에서 문제도 있었지만 만기제대는 했다.
이후 졸업하고 회사에 정규직으로 취업했지만 대인관계에서 정서적으로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오래 다니지 못했다.
단기알바들을 간간히 하다 부모님과 계속적인 마찰로 대략 10년 전 2개월 정도 입원 후 약을 복용하기시작 했다.
이후 낮 병원을 몇 개월 다니다가 ‘어우러기’ 라는 사회복귀시설로 옮겼다.
약이 정말 싫었다. 내 사고를 할 수 없고 하루 종일 몽롱했다.
독한 약에서 약한 약으로 바꿀 방법을 고민했다.
의사는 그저 잘못 되어 있는 나와 주변 상황에 대한 답답한 얘기만 했다. 방법을 얘기 해 주진 않았다.

그때 나는 약을 바꿔달라고 합리적으로 설득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의학지식도 경험도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고민 중 독한 약에서 탈출하기위한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 백승‘이란 문구가 생각났다.
그리고 시설에서 희망이 보였다. 거기서... 왜냐하면 내 내면을 정리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나는 꼼꼼하게 조사하는 걸 잘한다.
일기와 메모였다.
그래! 나에 대해서는 의사보다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나를 분석 해 보자.
시설에서의 프로그램들에서 힌트를 찾기도 했고, 회원들과 어울리며 부딪히는 과정에서 내 감정선 을 공책에 자주 적었다.
그것들이 나의 삶의 과정 나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들, 내가 해야 하는 것 들, 잘 하는 것 과 하고 싶은데 못 하는 것 들 등등 내가 사회에 나가는 데에 큰 발판역할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의사와 대항 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진짜 나에 대해 알고 있었고, 시설에서 많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어서...
내 과거의 감정선 을 정리하는 것이 제일 어려웠다.
그래서 개인상담과 사이코 드라마, 최면치료, 그룹상담 등을 찾아 다니며 교정해 나가려고 시간과 돈을 많이 썼다. 그래서 독한 약으로부터 1년 정도 지나서 탈출했다.
부작용이 적은 약으로..

이후에도 감정선 정리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내 감정선 정리에 관한 문제는 하루아침에 교정되기 힘들다고 생각되어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돌에 구멍을 만든다.’ 는 속담을 교훈삼아 꾸준히 조사하고 실천해 나갔다.
그리고 나의 치유에는 자연에서의 relax 가 도움이 많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부모님과의 관계개선도 중요하다고 생각 했지만 아버지의 자금적인 반대로 무료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서 ebs 방송국의 ‘달라졌어요.’ 프로에 문의를 해서 상담과 몇 가지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리고 나에 대해 정리하는 습관으로 목표와 인생의 철학도 생겨났다.
내 삶의 큰 틀의 철학은 ‘죽을 때 내 인생에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도록 할 수 있도록,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자’ 이다.
목표는 1-3개월 단기목표와 1년 이상의 장기목표로 구분해서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만들어 나갔다.

난 서울의 정서가 너무 싫었다. 서로가 너무 신경 쓰며 산다.
나의 정서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생각 되었다.
그래서 귀농귀촌 박람회를 방문도 하고 2주정도 농촌 일을 도와주며 내가 원하는 사회의 경험치를 쌓아 나갔다. 내가 진짜 원하는 환경에서 일, 삶을 살기위해...
경제적인 독립이 많이 고민 되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6개월), 코웨이 코디(6개월), 아름다운 나눔 장터 중고물건판매(10년) 등 일을 했는데, 판매와 영업, 기계고치는 것들이 재밌었다.
조직에 들어가서 오랫동안은 일은 못했는데,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들도 생기고 허리건강 관리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적 여유도 가질 수 있고, 내 적성에 맞는 내 사업을 해야 한다는 결론도 얻었다.
그리고 나중에 집을 사거나 돈을 모으기 좋은 전세를 얻기 위해 목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에 처음엔 100만원, 500만원, 1000만원, 2000만원 목표를 가지고 차곡차곡 모아갔다.

그러던 중 나에 대한 보상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과 외국에서의 삶의 경험치를 얻기 위해 2015.12 터키에 패키지여행을 갔다.
우리나라 안에서 만의 삶으로 인한 생각의 틀이 깨지는 여행 이었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외국에서의 삶이었다. 그리고 외국 여성과의 결혼. 외국여성과의 결혼이 목표가 된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보다 여유 있는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 많았고, 상대의 배경보다는 상대를 먼저 보고 주변 환경을 나중에 고려하는 사랑에 대한 자세가 좋았다. 외국인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퍼센티지가 훨씬 높다는 판단에서다.
한국 도착 후 동영상과 주민 센터 프로그램, 전화영어를 통해 영어공부를 시작했고 6개월 후 호주에 쉐어 하우스를 알아본 뒤 여행비자로 호주에 갔다. 브리즈번에서 2개월간 기초영어를 배우며 외국친구들과 짧게나마 영어를 구사하며 영어에 익숙 해 지려고 노력했다.
깊은 우정은 아니지만 오픈된 마인드의 외국인들을 사귀며 즐거웠다. 이후 시드니에 외국인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며 배운 영어를 적용며 여행을 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영어 였다. 내가 노력 해야 하는 건.
직업, 비자, 친구 모두가 영어를 필요로 했다.
호주의 맑은 공기와 자연과 조금 비슷한 제주도로 이사를 결정하고, 외국어 교육센터에서 미국인 선생님과 일주일 두 번 무료로 공부하며, 추후 호주에 다시 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 중 이다.
글을 쓰고 보니 최근 10년간 내 삶은 나의 목표로 인한 주도적인 삶이었던 것 같다. 뿌듯하기도 하지만 낮 설기도 하다.
목표 없이 살았던 예전의 삶은 선택되어졌지만, 목표가 뚜렷한 지금은 선택하는 삶이다.
다른 정신 장애인들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사회에서 밑거름을 주었으면 한다.

가끔 뉴스에서 정신질환자의 끔찍하고 황당한 행동의 사건을 보곤한다. 논평가나 전문가의 얘기를 들어보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선진국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신체장애, 정신장애자인이 일반인과 같은 학교를 다니는 경우가 많다.‘장애인이 이런 사람이구나.’ ‘이렇게 대처해야 되는구나.’ 라는 걸 학교에서 보고 배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걸 보고 느낄 수 없다.
서로 격리를 시키기 때문이다.
함께 공동체로써 살아가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보고 느꼈으면 한다.

  • 담당부서정신건강정책과

  • 전화번호044-202-3857

  • 최종수정일2023년 08월 08일

홈페이지 기능오류신고
콘텐츠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