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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다시 도약하는 나

  • 작성일2017-07-14 13:35
  • 조회수430
  • 수상자정O석

<다시 도약하는 나>

나는 1978년 8월 한 여름에 우량한 체격으로 어느 시골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동네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정신없이 쏘다녔습니다.
봄에는 온 천지에 꽃들..여름에는 뜨거운 태양과 냇가에서 멱을 감고 가을에는 눈부신 황금 벌판...겨울은 새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는 동화 같은 곳이 었습니다.

6학년 되는 해에 서울에 왔습니다.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 는 이곳 서울은 삭막 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온 몸으로 느꼈던 나인데 이곳은 달력을 보며 온도를 보며 겨우 시간을 가늠 했습니다.

우울한 날들이 많았습니다.
시골 친구들을 그리며 베겟잎 을 적시는 날이 많았습니다.
어느덧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고 난 사춘기 시절에 왕따를 경험했습니다.

반 아이들로 부터 폭력과 이른바 매점심부름 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견딜수 없어서 부모님에게 말했고 폭력은 멈추었으나 아예 아무도 말을 걸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나에게

“너 성적 올리고 싶지 않아?”
“그게 맘 먹은 대로 되?”

그 친구 말은 영어나 수학은 힘들지만 암기과목은 몽땅 외우면 성적은 나온다 는 것입니다.

중1에는 바닥이었던 성적이 중2 중간고사부터 암기과목은 1개 2개 정도 틀리고 평균 90점대 까지 끌어 올렸고 반에서 10등 안쪽, 전교 50위 안에 들었습니다.

친구는 성적순인건가? 아이들이 밥도 같이 먹자 하고 친한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중학졸업 직전 진로 상담 할 때 담임은 고등학교는 영어, 수학이 하위권이면 성적내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고등학교는 쉽게 말해서 일주에 4번 정도 있는 수학은 400점 만점이 되고 1번 수업 있는 암기들은 100점인 것입니다.. 공부 좀 한다 하는 아이들은 암기는 다 비슷하게 나오고 승부수는 영어 수학과목 들 이었습니다.
담임은 상위 실업고교를 권했지만 부모님은 인문계를 강력히 원했습니다.

나중에 내가 정신장애인이 되고 두고두고 부모님에게 엄마 때문에 내가 인문계 가서 병나고 이 모양 이 꼴로 산다고 부모님을 아프게 했습니다.

고등학교는 1학년은 암기과목으로 근근히 상위권으로 마치고 2학년은 도저히 공부 할 수가 없었습니다. 화학, 물리 등등 수학과목이 많아지고 난 공부를 등한시 하게 되었습니다.

2년제 전문대 전기과에 겨우 입학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지만 학업은 게을리 하고 술자리를 많이 했습니다.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군 입대를 결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막상 군대에 가려니 겁이 났습니다.
왕따나 폭력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중학교 때 왕따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면이 시작 되었고 환청과 환시의 조짐이 보였습니다.
군 입대 직전 증상이 심해져서 약 9개월 동안 입원을 했습니다.
1997년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입원했습니다.

당시의 병원생활을 회고 하자면 청소년 임에도 흡
연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10년이상 병원에 있는 정신장애인도 있었습니다. 흡사 감옥처럼 24시간 철창과 철문 안에서 지루한 날들과 시간을 허비하고 청춘을 허비하는 것 같았고 약에 취해 있거나 늘 무거운 우울함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이 던가 병동의 무료함과 단조로운 일상을 깨고 싶었습니다. 감옥 같은 곳에서 무엇이 있었을까요?

반입되는 무엇가로 술을 마시고 싶다 였습니다. 당시 알콜 의존이 아니라 감옥에서의 일탈마냥 깨고 싶었습니다.

첫날 야구르트를 햇볕에 널었습니다.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착안 한게 와인을 착안해서 포도주스를 햇볕좋은날 냉방을 하지않고 커튼뒤로 창가에 포도주스 1.5리터 세병을 널었습니다.
그날 자정쯤 병실을 바꾸어서 이불을 쓴채 마지막 순찰 후레쉬 불빛이가고 병동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습니다. 밖으로 가로등이 항시 있어서 커튼으로 조절 할수 있었습니다. 각자의 개인컵에 과자를 먹으며 그날밤 우리는 술에 취한 걸까요? 아닙니다.

처음이지만 우리 의지대로 그안에서 작은 혁명을 한겁니다.

우린 노래를 불렀고 다섯 남자는 묶여서 알콜 해독 주사와 잠재우는 약과 취했다는 감정이 얽혀서 단잠을 자고 다음 날 하이파이브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병동에는 포도 주스가 한동안 반입금지 되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 이지만 1995년 즈음 정신보건법이 만들어 졌다 들었습니다. 저는 정신과 병동이 영화나 드라마에나 있는 줄 알았습니다.
병원 화장실에 문고리가 없고 사지가 묶이고, 청년에게 기저귀를 채우고 환자를 폭력으로 대하는 인권의 사각지대라고 생각 되고 지금의 정신장애인은 처절하게 생존(Survial)해가고 있습니다.

1998년 4월 병원을 나서면 바로 아무렇지 않게 지낼것 같았습니다.

이시기는 나름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IMF 라는 국가의 위기가 오고 통신수단이 인터넷이 보급되고 핸드폰이 보급되기에 이릅니다. 저는 퇴원 후 적응하지 못하고 10여년 가까이 긴 시간을 어두운 방안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집안 친척 중에 가내수공업 형태에 공장을 열었고 그곳에서 일하며 재기(Recovery)할 수 있었습니다.

2002년 가을 2학기 다시 학교를 다니고 졸업 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 후 다시 집에서 지대다가 재발 후 지역정신보건센터에서 바리스타일이 연계되어 이후 바리스타일을 7년 정도 했습니다.
이후 한 번의 재발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2번째 재발할 때 조울이 끼어들어서, 지금 저는 조현, 조증, 우울증이 함께 범벅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연찮게 7년 전 바리스타일을 소개한 사회복지사분에게 인사 하러 갔다가 ‘활동가’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호기심 반 기대 반 정신장애인 활동가 일을 시작했습니다. 인권이나 활동가다 이런 거에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이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도 많고 왜 이일이 중요한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몸담고 있는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대표이하 11명중 8명이 정신장애인입니다. 4명은 뜻을 함께한 비당사자 활동가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까요? 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전국에 한 곳, 제가 있는 곳입니다. 4년 가까이 김락우 대표와 지금의 대표 신석철 대표 그리고 두 분의 당사자가 활동비지원 없이 땀과 열정으로 정신장애인의 인권을 위해 정신장애인이 이땅에 편견없이 바로서길 바라는 마음으로 꿋꿋히 이끌었습니다. 비로써 2016년 8월 서울시에서 1년의 사업비를 지원하고 그 안에 프로그램 진행비의 명목으로 적지만 소중한 땀의 댓가를(40만원) 받고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관악구 봉천동에 한곳이지만 많은 곳에 자립을 꿈꾸고, 당사자의 목소리를 내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당사자 스스로의 노력도 중요 하지만 지역구 마다 자립생활센터가 자리잡아 가야 합니다. 자립과 지역의 소통의 역할을 할 것이며 지역의 당사자 역시 사회활동이나 경제 활동을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효과로서 지역에 연계되어 직업도 갖게 되고 지역의, 사회의 국가의 구성원이 될 것입니다.
정신장애인이 장애로써 불편함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 곳곳의 편견이 장애입니다.

자립생활센터가 가교가 되어 화합하게 하는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자립이 현재 하고 있는 사업에는 당사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M.A.D

정신장애인 연극단 (인권침해와 편견의 사례를 연극으로 표현)이 있습니다.

동료가 동료로써 서로에게 지지와 공감해주며 집에 있는 당사자를 찾아가는 동료지원 활동, 이건 단순히 동료지원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나를 닮은 나와 같은 동료가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주고 희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동료지원으로 사회로 일터로 복귀하는 성과도 내고 있습니다.

끝으로 당사자 기자단의 양성(Mind post) : ‘우리의 목소리를 우리가 전한다는 사명’ 이라는 슬로건 아래 기사문을 연습하고 기사도 써가며 단련하고 있습니다. 언론의 잘못된 보도와 기사문에 대응하는 역할도 할 것 입니다. 인터넷 공간에 신문 창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텐(10)데시벨이라는 팟케스트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데시벨은 소리의 단위이자 귀를 기울려야 들을 수 있는 소리정도 랍니다.
정신장애인의 우리의 목소리 작지만 들어 달라는 의미를 내포 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에너지와 활동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어쩌면?

조증오른 날이 많아서 항상 업 된 듯하지만 제게는 조증이 파워이고 원동력인 듯 합니다. 이른바 조증파워입니다.

제게 조증은 활화산이고, 우울중은 약진 강진을 넘나드는 지진이고, 휴화산같은 조현이 함께 하는 중입니다.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8명의 개성 넘치는 정신장애인활동가들과 4명의 비당사자 활동가들이 울고 웃으며 정신장애인의 인권을 위해 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일이 좋기도 하고 조금의 사명감도 있습니다.
나와 같이 아픔을 안고 있는 이들이 나보다 빨리 사회에 복귀하는 바람으로 이일을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정신장애인을 위한 ‘개정정신보건법’이 곧 시행 될 것 같기에 바람을 적어봅니다.

보통 우리는 중요한 시기에 중도에 정신장애인이 됩니다.
폐쇄병동에 입원과 동시에 사회와 단절이 아닌 소통이 되어야 한다 생각됩니다. 통신의 자유가 보장되고 개인전화기를 쓰는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생각됩니다. 개인의 전화는 단순히 통신이 아닌 친구나 지인들과 연락이 단절 되는 것을 막아 줄 수 있습니다.

학업중의 학생은 퇴원 후에 학업을 따라 가기위한 대안과 발달장애인이나 기타 장애에 있는 특수한 재활교육도 필요 합니다.
예를 들어 인지의 기능이 떨어진 고등학생이 퇴원 했을 때 그에 맞는 대안교육이 행하여 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회복 되어서 학업을 따라가는데 어느 정도 차이가 지지 않고 사회에 복귀하는 시기도 빠를 것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다시 나왔으면 바로 직장이 연계가 되는 시스템 직업 전선에 뛰어들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면 직업교육이 되어지는 시스템
단순히 급여를 주는 방법 보다는 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하는 교육복지가 중요할 것입니다.

노후의 당사자, 빈곤한 당사자에게는 함께 살아가며 의지 할 수 있는 공동주거 시설이 필요할 것입니다.
단순히 시설이, 아닌 요양원이 아닌, 서로에게 의지 하는 공간이 더 소중한 우리는 마음이 아프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1978년 정현석이 태어나고
1997년 또 다른 정현석이 태어나고

20년이 지난 지금은 정신의 힘듬 과 장애는 소중한 경험과 지식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살아있는 백신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구름 뒤 에서 잠시 쉬는 작은 별 이고
구름이 걷히면 다시 빛나는 별이 되리라 믿습니다.

  • 담당부서정신건강정책과

  • 전화번호044-202-3857

  • 최종수정일2023년 08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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