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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정신건강복지법 체험수기 공모전 수상작

[은상] 희망 너머의 것

  • 작성일2017-07-14 13:58
  • 조회수746
  • 수상자김O준

<희망 너머의 것>

때로는 결코 이야기하고 싶지 않지만, 꼭 말해야 하는 것도 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처럼 나는 그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며, 나와 비슷한 고통을 겪는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갈망하니까.

나는 이른바 명문고등학교라는 곳을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때는 아직 고교평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학 입시 못지않게, 아니 대학 입학을 위한 준비 절차로서 고교 입시 또한 거대한 무게감으로 아이들을 압박했다.

목표로 한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그 학교의 교복을 몸에 걸치고는 전신거울 앞에서 신이 나서 폴짝 뛰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체크무늬 교복은 그 지역사회에서 나의 계층을 단박에 설명해주는 것이고, 시각적으로 생생히 전달하는 것이었으며, 어딜 가나 존중받을 수 있는 특별한 통행증과 같은 것이었다. 또한 어른들이 구축해놓은 이 세계에서 다가올 미래는 나의 편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보증서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한 오만함과 자기만족은 곧 닥칠 시련 앞에서 내가 날개 없이 추락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고1 첫 모의고사와 두 번째 모의고사에서 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고, 그들 가운데서 우뚝 솟아난 기분마저 들었다. 모의고사 성적표의 뒷면에는 내 성적으로 지망가능한 대학이 적혀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모든 학생이 간절히 바라는 그 학교였다. 그 얄팍한 종이로 만들어진 성적표 한 장을 손에 쥐고는 마치 세상 전부를 쥔 것처럼 의기양양해 했다. 그러나 내 자신이 점점 건강해지지 못한 상태가 되고 있음은 미처 알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소심하고 걱정 많고 스트레스를 잘 받는 성격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청소년기에 병증으로 나타날 거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정신질환은 아주 불행하고 특이한 사람들에게나 생기는 불행일 뿐 나와는 무관한 일이며, 따라서 작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내가 정신질환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건 내 진로가 의대로 결정이 나서 정신과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을 때뿐이라고만 생각했다. 정신질환의 씨앗은 이미 내 속에서 움을 트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아주 먼 아프리카 빈국의 내전과 기아처럼 아득하게만 대했던 것이다.

생각을 멈추려고 해도 계속 났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나타나서 나를 말려 죽이려고 작정하는 것 같았다. 수업 중에도, 자습시간에도, 심지어 시험을 치를 때도. 생각은 분열하는 세포처럼 2의 배수로 늘어나 삽시간에 나를 장악했다. 생각이 생각을 낳았고, 그 잡념과 망상들이 또다시 더 많은 생각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그것은 나의 불안을 먹이로 삼고는 더 왕성하게 자라나는 것 같았다. 내 처지는 순식간에 극도로 나빠졌으며, 그로 인해 더욱 가중되는 공포와 불안은 병증을 더 부채질했다.

점차 내 의식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해갔고, 생각이 분열하는 것만큼이나 내 자신도 분열돼 갔다. 우등생은 점점 열등생으로 전락했고, 선생님은 내가 공부에 게을리 한다고 여기고는 냉담하게 대하기 시작했으며, 경쟁자인 친구들은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겪는 당혹스러운 일이며, 내 힘으로 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절망적이었다. 어떤 때는 송곳으로 내 머리를 찔러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나를 추락시킨 것은 역설적이게도 머리였으니 그 머리에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추락하는 성적, 좁아지는 입지, 보이지 않는 돌파구, 점점 잃어가는 의욕,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 부끄러움, 열패감, 절망감 등이 파리지옥처럼 나를 가두고는 내 진액을 빨아 마시는 기분이었다.

결국, 나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던 정신과에 다녀야 했다. 의사선생님은 처음으로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셨고, 내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지 공감해주셨다. 그분은 내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심한 강박증을 앓고 있으며, 뇌신경전달물질 분비에 이상이 있으니 약물치료와 상담치료를 병행하자고 말씀하셨다. 나는 의사선생님이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시는 것만으로 병이 순식간에 다 나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만큼은 정말 기분 좋게 집으로 왔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건 ‘첫째 날’일 뿐이었다. 친구들이 보충수업을 받는 시간에 나는 2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왔다. 14일분 약을 담은 봉투는 작은 가방만큼이나 두툼했고, 그것을 교실에 앉아 하루 세 번 먹을 때마다 친구들이 몰려와 무슨 약인지 묻곤 했다. 나는 수치스러워 차마 대답하지 못했고, 그럴수록 친구들의 호기심을 더 부추겼다. 나는 학급의 중심에서 순식간에 서커스 동물처럼 구경거리로 전락한 것 같았다. 약물치료는 효과가 없었고, 효과 없이 약만 먹을수록 불안감이 더 심해졌다. 약물치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수록 절망감은 더욱 깊어졌다. 정말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았다.

1학년 1학기가 마치기 직전, 담임선생님께 자퇴 의사를 밝혔다. 도저히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이어지는 생활. 아침 자습 1시간, 아침 보충수업 1회, 오후 보충수업 2회, 야자 5시간이라는 숨 막히는 시간은 차라리 쉬운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선생님들이 시간마다 얼굴을 바꿔가며 교실에 들어와 내 성적을 타박하며 때리는 건 견디기 힘들었다. 그들은 내가 나태해져서 성적이 떨어지는 것이니 채찍질을 하면 나쁜 버릇을 고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것 같다. 수학 선생님이 나를 모두가 보는 교실 앞에 무릎을 꿇린 채 발로 밟던 그날, 나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2학기부터는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말했다.

담임선생님을 믿었다. 그래도 그분은 담임이니까. 그분은 나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인생경험도 많은 어른이니까. 나는 그분 앞에서 나의 고통을 다 말했다.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다른 어른들을 대변하듯 나를 대했다. 많은 어른들이, 많은 사람들이 정신질환자를 대하는 딱 그 태도를 대변하듯 그는 내게 무관심했고, 내 노력과 정성이 부족하고, 정신력이 약해서 그런 거라고만 말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내가 이번 위기를 넘으면 더 강해지고, 더 나은 인간이 될 거라고 희망(?)찬 말씀까지 하셨다. 그분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이해할 태도조차 없었으며, 정신질환자를 낙오자로 대할 뿐이었다. 그날 나는 교복이 다 젖도록 눈물을 흘렸지만, ‘낙오자’인 내게 담임선생님은 손수건 한 장 건네지 않았다. 감기몸살에만 걸려도 주변에서 걱정을 해준다. 하지만 정신질환은 감기몸살보다 훨씬 가혹한 것이지만 비웃거나 책망만 한다. 정신력이 약하고 나약해서 그런 것이라고 환자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심지어는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한다는 과격한 소리까지 하는 이도 있다. 나는 그런 환경에서 견뎌야 했다. 결국 학교를 관두려는 계획은 접어야 했으니까. 같은 반 친구 중에 네덜란드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아버지의 국내 발령으로 귀국, 우리 학교로 전학 온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 때문이었다. 내가 학교를 관두지 못한 것이. 학교를 관두겠다고 말하자 그 친구는 울먹이면서 제발 옆에 있어달라고 했다. 나마저 떠나면 이 학교에서 혼자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그 친구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던 차였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멀쩡한 아이를 병원으로 내몰았으니까.

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예전의 나는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이 병과 싸울 기력도, 의욕도 없었다. 기계적으로 학교와 집만 오갈 뿐, 더 이상 성적에 연연하지 않았고, 모든 걸 내려놓았다. 비웃음, 조롱, 책망, 체벌 같은 건 그냥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며 묵묵히 견뎠다. 그러는 사이 나는 이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 학교를 나올 수 있었다. 어느덧 졸업이었다.

졸업을 하고도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이 사회는 나 같은 정신질환자가 적응하여 살 수 있는 관대함을 갖추지 못했으니까. 나를 담아줄 곳이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겨우 대학에 갈 수 있었고, 그 뒤로는 늘 과거에 파묻혀 살며 지냈다. 과거의 원망, 과거의 분노, 과거의 실패가 지금의 나를 장악했고, 그런 내게 미래는 없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결국 보건소 자살예방센터를 찾아야 했다.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식칼을 움켜잡고 내 손목을 그을 뻔했던 밤이 지나자마자 바로 보건소에 전화했다.

나를 구한 것은, 나를 지금껏 살게 하고 어떻게든 사회에 적응토록 한 것은 학교나 어른이 아니었다. 여자친구였다. 12년째 사귀는 내 여자친구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감당하고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나는 여자친구에게 정서적으로 전적으로 의지한다. 또한 이런 나를 확고하게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 내게 힘을 북돋운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차마 저버릴 수도, 실망시킬 수도 없어서 항상 투쟁하듯 하루하루를 견뎠고, 적은 월급을 투덜거리지 않고 작은 회사라도 다녔으며, 부정적인 생각과 아픔으로 가득한 과거를 떨쳐내려고 항상 노력했다. 이런 노력들은 큰 효과가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신감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으니까.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낸다.” 니체의 말이다. 나에게는 여자친구와 부모님이 ‘왜 살아야 하는지의 이유’이지만, 다른 환우들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신질환자가 주변이 있다면 부디 그를 소중히 여겨줬으면 한다. 그를 소중히 여겨줘야 그가 당신을 소중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 있으니까.

어쩌면 내가 발병한 초기에 어른들이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었더라면 내게도 돌파구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내 여자친구가 내게 보여준 인내심과 관용의 반만 보여주었더라면 내 인생이 치명타를 입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나처럼 이제 막 정신질환이 발병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청소년들이 가엽다. 그런 시기를 견뎌내고 어른이 되었지만 편견으로만 바라보는 사회 앞에서 또다시 낙심하는 성인 환우들이 마음 아프다. 약물치료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그것이 다행히 효과를 보이면 괜찮지만, 효과가 없거나 적을 시 또 다른 절망에 빠지게 되는 모든 정신질환 환우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적어도 내 경우에 절실한 것은 진정으로 나를 이해하고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특히 청소년 시기에 발병한 나로서는 그 불행을 혼자 감당할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신질환 치료는 약물치료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한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 정신질환자도 종류가 다양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우선 자신의 고통을 공감해주고 자신을 믿어줄 사람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적어도 마음의 통증에 있어서는 의약품만큼이나 사람과의 유대감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정신질환이 날로 늘어나는 요즘, 전문적인 상담치료의 저변을 확대하고 의료비 등 문턱을 낮춰 환자에게 힘이 되어주었으면 한다.

특히 나처럼 청소년기에 증상을 보이는 경우, 제대로 된 보호와 치료를 해줄 청소년(아동 포함) 전용 치료시설이 절실하다. 교복을 입고 어른들로 가득한 정신과 진료실 밖 대기의자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수치스럽고 무서워서 병원에 다니기가 싫어졌다. 의사선생님은 좋은 분이셨지만, 청소년 환자를 더 많이 다뤄보신 분이었더라면 더 좋았으리란 생각이 든다. 결국 나는 미비한 사회적 인프라, 무관심, 편견, 효과 없는 약물 치료로 인해 치료를 중단했고, 그 이후로 너무나 긴 시간 동안 삶을 내팽개쳤던 것이다.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이므로 어쩔 수 없이 어둡고 절망적인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더 절망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게 아니다. 또다시 용기를 가지기 위해, 지금도 혼자 어떻게 할지 몰라 방황하고 고통스러워하는 환우들을 위해 내가 겪은 걸 짤막하게 썼다. 누가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결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희망을 포기하는 순간, 그것 너머의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므로.”

  • 담당부서정신건강정책과

  • 전화번호044-202-3857

  • 최종수정일2023년 08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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