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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정신건강복지법 체험수기 공모전 수상작

[금상] 보통사람

  • 작성일2017-07-14 14:07
  • 조회수1,019
  • 수상자송O언

<보통사람>

비틀거리는 걸음, 집에 있던 소주 두병에 가지고 있던 약을 모조리 털어 넣었다. 분명 집이었는데, 언제 밖으로 나가게 된 건지 모르겠다. 기억이 언뜻 언뜻 난다. 정신이 얼핏 들었을 때는 코뼈가 부서지고 앞니가 깨진 상태였다. 손목에도 상처가 있었다. 칼로 몇 번을 그어댔는지 쇳독이 올라 피와 섞여 퉁퉁 부어있었다. 눈은 어디에 부딪혔는지 퉁퉁 부어있었다. 오른손 손가락 두 개는 반쯤 잘려 나가 있었다. 신경 바로 직전까지 잘려서 한손가락 당 열두 바늘씩을 꿰매야했다. 허벅지에도 한 여덟 개쯤은 될 법한 칼자국이 나있었다. 역시나 피가 흥건했다. 처음 알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면, 그 피가 굳어서 까만 재처럼 변한다는 것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내 꼴을 보고 비명을 질러댔고, 경찰차와 구급차가 동시에 달려왔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경찰은 내게 물었다. 누가 그랬느냐고. 내가 그랬다고 하니 자해한 사람은 병원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고 했다. 그곳에는 자해할 수 있는 도구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나. 그래서 나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었다. 72시간동안. 그것이 응급규칙이라고 했다. 여기서 정말 웃긴 점은, 난 그날도 아주 멀쩡하게 회사에 출근했다 집에 온 상태였고, 내 주변 그 누구도 내가 이 지경까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나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전 모든 소지품을 맡겨야했다. 그전에 전화 한통을 부탁했다. 그리고선 회사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자전거를 타다 사고가 나서 며칠 동안 출근이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그래, 나는 마지막까지 보통사람인척 해야 했다. 자살시도를 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럼 나는 더 이상 보통사람 취급을 받을 수 없을 테니까. 그 전화를 끊고선 병실에 들어섰고, 담요와 슬리퍼만 있는 그곳에서 삼일을 보냈다. 하루에 세 번 병원에서 주는 밥을 먹었고, 그 후엔 약을 먹었다. 그리고선 아주 까만 꿈을 꾸었다.

시나브로 지쳐왔던 것 같다. 부모님의 이혼. 어린 시절부터 지속되었던 아빠의 폭력과 욕설. 언니의 가출. 이 기억들은 내 발목을 계속해서 잡았다. 난 성인이 되자마자 집에서 뛰쳐나왔지만 밤이면 다시 그 지긋지긋한 지옥으로 돌아갔고,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기를 되풀이 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병원을 찾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지금은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까, 날 망가뜨린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으니까,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 4년만이었던 것 같다. 날 그렇게 끔찍하게 짓밟아놓곤, 자기가 위암이란다. 병원비가 없으니 좀 도와달란다.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었는데, 막상 나약해진 모습을 보니 또 불쌍하더라. 그래서 난 결국 수술비를 부담해야했고, 아빠를 마음 편히 미워할 수도 없는 현실을 원망해야만 했다. 수술이 끝나고, 병실 침대에는 너무 야위고 앙상하게 말라버린 아빠가 누워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몇 번이고 욕을 하고 싶었고, 나한테 도대체 왜 그랬냐고 윽박지르고 싶었고, 아픈 모습을 보면서 불쌍한 마음에 울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난 마음의 아무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서야만 했다.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어쨌든 아빠의 수술도 끝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이제 조금씩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점점 더 무기력해졌고, 우울해졌고, 나도 모르게 울고,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못자는 나날이 지속됐다. 가끔씩은 사람이 쏟아져 나오는 광장이나 지하철에서 패닉상태를 맞기도 했다. 결국 난 병원을 찾아야했다. 보통사람들은 찾지 않는 그런 병원. 의사는 내게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과 공황장애, 그리고 수면장애라고 했다.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과 동시에 불쌍해하는 상반된 감정이 이 증상을 가속화시킨다고 했다. 그때부터 치료가 시작했다. 약의 적정량을 찾을 때까지는 전보다 더 끔찍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의사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사람마다 맞는 약이 다르기 때문에 이겨내야 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때 난 사람 많은 곳에서 갑자기 토하기도 했고, 벌벌 떨며 주저앉았고, 밤이면 문득 깨어나 울거나 자해를 하다가 정신을 차리기도 했다. 하지만 난 계속 연극을 해야 했다. 보통사람인척. 평소처럼 회사를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며 거짓 웃음을 지어야했다. 혹여 누가 어디가 안 좋은지 물으면, 그저 감기인 것 같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보통사람인척 해야만 했다. 숨겨야만 했다. 정신이 아프다고 했을 때 들이닥칠 시선들이 너무 무서웠으니까. 다들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떠나갈까 무서웠으니까. 그때 난 고작 24살이었다.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하기엔 너무 어렸고, 아주 많이 아팠지만 감춰야만 했다.

한동안은 늘 술과 함께 살았던 것 같다. 술에 수면제를 털어 넣고 잠들면 아주 까만 꿈을 꿀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다음날 느끼는 우울의 강도는 심해졌고, 가끔씩은 내가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자해를 한다거나, 밖에 나간다거나, 난간위에 위태롭게 매달리다가 정신을 차린다거나 하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 포기하고 싶어졌다. 보통사람인척하는 것도 이제는 너무 지쳐서 정말 다 그만하고 싶어졌다. 약을 먹는 것도, 치료를 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하루에 열개는 족히 넘는 알약들을 때마다 챙겨먹는 일, 그게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육 개월이 되고, 일 년이 넘어가면서 점점 더 지쳐만 갔고 점점 더 아파만 갔다. 나는 의사선생님께 말했다. 이제 다 그만두고 싶다고. 이렇게 약을 먹는 것도, 치료를 하는 것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데 이제 다 그만두고 싶다고. 매일 때마다 약을 챙겨먹으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시냐고, 내가 얼마나 이상한 사람인지, 얼마나 다른 사람들과 다른 건지 되새기고, 또 되새기는 것만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 의사선생님이 해준 말이 있었다. 아직도 너무 생생히 기억나는 그 말.

“약을 먹는다고 남들과 다른 것이 아니에요. 감기에 걸리면 감기약을 먹고, 위가 안 좋으면 위장약을 먹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힘들면 그에 맞는 약을 먹고 치료하면 그뿐이에요. 당신은 남들과 다르다고, 그래서 힘들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어떤 이는 허리가 아프고, 어떤 이는 목이 아픈 것처럼, 당신도 그런 것뿐이에요.”

이 말을 하면서 의사선생님은 날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심장을 아프게 했는지 모르겠다. 왜 그렇게 진심으로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만약 날 동정했거나, 정말 불쌍한 사람을 대하듯 했다면 반감을 가질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내가 정말 불쌍하고 나약한 사람이구나 하면서 오히려 더 좌절하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냉정한 대답에서, 나는 내가 그저 환자들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아픈 사람들 중 그저 한명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보통사람인척 연극하면서 살았는데, 알고 보니 나도 보통사람이었다는 거다. 그저 마음이 아픈 보통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약을 먹고 치료를 받는 것, 그게 전부였다. 그때부터 난 술을 끊었고 치료에 전념했다. 약을 꼬박꼬박 먹었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참 질긴 감기구나, 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난 치료 중에 있다. 하지만 수면제양도 점차 줄여가고 있고, 항우울제 복용량도 줄이고 있다. 더 이상 잠에서 깨어 자해를 하거나 난간위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그저 흉이 진 상처들에 약을 바르며 기다린다. 언젠가는 나을 것을 알기에,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을 알기에. 그래도 가끔씩 정말 지치고 힘들 때면,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는 유난히도 지독한 독감을 앓고 있는 중인, 그저 보통사람이라고.

  • 담당부서정신건강정책과

  • 전화번호044-202-3857

  • 최종수정일2023년 08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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