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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정신건강복지법 체험수기 공모전 수상작

[가작] 새장 밖으로 나온 새

  • 작성일2017-07-14 13:55
  • 조회수640
  • 수상자신O철

<세상 밖으로 나온 작은 새>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장 신석철

나의 인생의 시작은 정신질환에 걸린 이후부터라고 생각한다. 내가 태어난 해는 1983년이지만, 내가 진정으로 나의 인생을살게 된 것은 정신질환에 걸린 이후부터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예전에 나는 자신감이 없었고, 어느 때부터 어른 되기를멈추었었다. 그러나 정신질환을 겪으면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 경험들을 통해서 점차 어른으로 성장해나가고 있다. 지금부터 나는 글을 통해 내가 거듭나고 있는 과정을 고백하고자 한다.

◆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전

나의 10대를 생각해보면, 매일 사고를 쳤던 불량한 학챙시절이 떠오른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매일 혼내셨고 때때로 술은 드신 후에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셨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10대를 보내고 나는 할 것이 마땅치 않아서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입대를 했다. 그리고 전역 후 스물 두 살에 아르바이트로 호프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년 동안 꾸준히 일하면서 사장님에게 인정을 받아서 매니저를 하게 되었다. 아르바이트 할 때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게 되었지만, 내 마음에는 항상 우울함과 불만스러운 감정들이 있었고, 그 감정들이 나를괴롭혔다. 이런 감정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도 해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불만스러운감정들을 해소하기 위해 매일 술을 먹었고, 그렇게 해도 감정이 풀리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과 가족에게 폭언과 폭력을 해서그 감정을 해소하곤 하였다. 그렇게 나의 가족과 주위 사람들은 피해자가 되어갔다.

결국에는 일을 그만두고 매일 술을 마셨다. 만취된 모습으로 집에 가는 길에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면 뭘 쳐다보냐고소리 지르면서 싸우기도 많이 했고, 폭력 사건으로 경찰서를 내 집처럼 다녔었다. 그런 사고와 사건들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부모님이 해결해주셨다. 그 과정에서 부모님은 항상 말다툼하셨다. 나는 반성하지 않은 채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나를낳아서 왜 이런 고생을 해.” 라고 말하면서 어머니와 다투고는 화난 감정을 참지 못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매사술을 먹으면서 보냈던 20대에 유일한 즐거움은 여자친구였다. 20대 중반에 만났던 여자친구와 매일 만나서 데이트했다. 나는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데이트 비용을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아버지의 퇴직금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훔친 금액이 조금씩 늘어갔지만, 나는 죄책감 없이 여자친구와 계속해서 데이트했다. 결국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반성하지 않고 계속해서 술을 먹었고, 매일 술을 먹는 나의 모습을 여자친구가 싫어하게되고 서로 다투게 되면서 여자친구와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여자친구와 크게 한 번 싸우고 나서 혼자 술을 먹고 늦은 시간에 집으로 들어갔는데 내 방에 맥주 캔 2개와 땅콩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평소에 집에서는 절대로 술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내 방에서 술을 먹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일도 아니었지만, 그 때는 화가 나서 어머니를 깨워서 “왜 내방에서 술을 먹었어?” 라고 물었다. 어머니는 “네가 먹고서 왜 나에게 화를 내는거냐.” 며 큰 소리로 나에게 야단을 치셨다. 그렇게 서로 큰 소리로 다투다가 결국 어머니와 나는 파출소까지 가게 되었다. 파출소에서 경찰관은 나의 술 취한 모습을 보고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아 분한 마음이 커져만 갔다. 조사를 받고 집에 도착한 나는 너무 화가 나고 분노를 참을 수도 없어서 내 방 책상과 유리창을 깨뜨리고 소리를 마구 질렀다. 그 후에 거실로 나와서 소파에 누워 있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건장한 청년 3명이 나를 강제로 제압한 후 마치 강력범죄자 다루듯이 팔을 밧줄로 묶고는 응급이송단 차량에 태우고 낯선 곳으로 데려갔다.

이동하면서 나는 팔이 너무 아파서 밧줄을 풀어달라고 요청했지만, 한 건장한 청년은 병원에 들어가면 풀어주겠다고 말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차안에서 난동을 부린 것도 아니고 그 청년들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범죄자처럼 대우를 당하는 것이 인권침해 아니냐고 묻고 싶다 하지만 그 때 당시 엄청난 공포감이 들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병원에 들어가서 한 의사를 만났고, 의사에게 폭언을 해서 결국 난생 처음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 정신병원에 입원 한 후
답십리 인근에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그 동안 봐왔던 병실이 아닌 마치 교도소 같은 곳에 나를 감금을 하였고 왜내가 여기 들어가야 하냐고 묻자 며칠 관찰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서는 나가버렸다. 그때 당시 들었던 기분은 마치 내가 동물보다 더 못한 인간이 되었다는 수치심이 들었고, 그렇게 1주일 동안 일명 CR이라는 곳에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곳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찾을 수 없었었다.

전화를 하고 싶어도 정해진 시간 외는 전화도 못할 뿐만 아니라 보호사가 옆에 있는 곳에 공중전화가 있어서 사적인 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또한 약을 먹을 시간에는 1열로 줄을 세우고 약을 먼은 후 보호사 앞에 가서 입을 벌려 확인을 받아야 병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병원 밖에 소식은 전혀 들을 수 없었고, TV시청도 마음대로 시청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교도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곳에 나를 입원 시킨 부모님을 원망하며 다신 부모님을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고 매일 침대에 누워 지내는 생활이 나의 일상이었다. 그렇게 생활을 하는데 처음으로 면회를 오신 아버지께서 “너는 더 이상 어머니와 살 수 없으니까 부산으로 내려와서 아버지랑 살던 지, 아니면 계속 입원을 하던지 선택해라.” 나에게 말씀을 하신 후 면회실을 나가셨다. 그렇게 아버지가 떠난 후 면회실을 나오는데 벽에 있는 주거시설 입소자를 모집하는 홍보물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 홍보물이 궁금해서 병원에 있는 사회복지사한테 물어 보게 되었고 그 사회복지사는 낮에는 활동을 하고 밤에는 잠을 잘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을 내게 해주었다.

내가 입원을 하였던 과정에 어머니에게는 너무 충격적으로 다가와서 더 이상 어머니랑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가 퇴원할 수 있는 방법은 주거시설에 입소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한테 주거시설에서 생활하겠다고 설명하였지만, 아버지는 그냥 부산으로 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나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감이 있었기 때문에 죽으면 죽었지 부산에 내려가 같이 살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주치의 선생님과 상담 하였고 아버지를 설득해서 6개월 만에 주거시설에 산다는 조건으로 정신병원에서 퇴원을 하게 되었다.

◆ ‘내 인생의 첫 터닝 포인트: 중랑한울지역정신건강센터’

주거시설 규칙 상 낮에는 반드시 병원 또는 사회복귀시설에 다녀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에 나는 난생처음 사회복귀시설에 다니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모습과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내가 여기를 다닌다고 내 인생이 달라질까” 라는 생각을 하였고 사회복귀시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나를 위해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시던 친절한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있어서 조금씩 정을 붙이게 되었고 사회복귀시설을 다니는데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옆에서 나를 항상 지켜보던 담당선생님께서 ‘내 자신을 관찰하고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보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보는게 어떻겠냐’ 고 제안을 해주셨다. 처음에는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을 하였지만 나를 신뢰해주는 선생님의 조언이니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프로그램을 2년간 진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노력한 만큼 동료들이 따라오지 않고 반응이 없자 지쳐갔고 그러한 감정이 쌓이면서 첫 위기가 찾아왔다.

그 위기는 난청으로 잘 들리지 않은 동료 한분이 있었다. 그 동료는 항상 큰 소리로 대화하면서 종사자 선생님에게 함부로 하는 모습이 자주 보이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본 나는 그 동료를 점점 싫어하게 되었고 크게 한번 싸우게 되었다. 싸우고 난 후 서로 사과를 하면서 그 동료의 모습에서 발견한 것이 있었다. 그건 예전에 가족과 주의 사람들에게 폭력적 행동을 했던 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서기.관계 맺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점점 정신질환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그동안 주변사람들과 가족들에게 이기적인 행동을 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동료가 나의 문제점을 알게 해주었고, 다시서기.관계맺기 프로그램이 나 자신을 바라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었던 것 같다. 그렇게 활동하는 과정에 동료들의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생활해왔기 때문에 나도 동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까 고민을 하게 되었다.

◆ 나의 첫 도전: 동료지원가

그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가 ‘중랑한울지역정신건강센터의’ 동료지원가라는 활동인 것을 알게 되었고, 이 활동으로 2013년 7월부터 9월까지 2개월 간 ‘중랑한울지역정신건강센터’ 에서 동료들과 서로 어려운 점을 이야기하고 동료를도와 가면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또한 서울시정신건강증진센터에서 시행하는 동료지원가 2기를 지원하여 교육을 받고 더욱전문적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중랑한울지역정신건강센터’ 에서 동료지원가 역할을 하다가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대표님이 사무실에서 활동을 할수 있는 활동가가 필요하다고 요청을 하여서 나는 1주일에 2번은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에서 업무를 하고 3번은 ‘중랑한울지역정신건강센터’ 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활동을 하면서 또 다른 나의 문제점을 발견을 하게 되었다. 그 문제점은 동료들과 조금 더 친해져야 하는 역할이 있었지만, 나는 동료들보다는 직원들과 사이가 더욱 더 친해져 가고 있었던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 못한 채 활동을 하였고, 그렇게 2013년을 마무리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중랑한울지역정신건강센터 관장님께서 중랑한울을 종결하고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근무를 하지 않겠냐고 물었고 나는 바로 “네” 라고 대답을 하지 않고 생각을 해보겠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중랑한울에서 조금더 도움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평소에 롤 모델로 생각하고 있던 허ㅇ 선생님께서 했던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사회복귀 시설을 3년만 이용하고 무엇이든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 회복에 도움이 된다” 는 말이 떠올랐고나는 중랑한울지역정신건강센터를 종결하고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관장님께서 나에게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근무하는 것을 제안한 이유는 내가 2013년의 고민을 했던 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안을 해주신 것 같다. 왜냐하면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을 하게 되면 동료선생님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더욱 더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가 고민을 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동료 지원가활동을 하면서 내가 변한 점은 가족들과 소통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고, 무엇보다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던 것 같다. 또한 과거에는 힘들이 있으면 금방 포기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어려움을 잘 극복하여 꾸준히 할수 있는 지구력이 생기게 되었다. 무엇보다 더 가장 큰 변화한 점은 자기중심적 이었던 ‘신석철’ 이 아닌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할 수 있는 힘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 나에게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 새로운 도전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나는 조금씩 성장해 나가면서 2014년 1월부터는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입사를 하여 권익옹호 팀에서 일을 하게되었다. 처음에는 부족한 내가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에서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평소에 존경하고 롤 모델로 삼고 있는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대표님이 계셨기 때문에 불안감을 다소 해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표님과 함께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에서 활동을 시작을 하였고 2014년 3월부터 숭실대학교 평생교육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을 하였다.

학교생활과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당사자 주도형 회복문화대학 운영)을 병행하는 입장에 놓인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씩 점점 지치게 되었다. 그렇지만, 맡겨진 일이 있다는 행복감과 무엇보다 내 옆에는 든든한 자립생활센터 식구들이 있다는 생각에 힘들어도 참고 인내하면서 견뎌온 시간들 하지만 결국 지친 몸과 마음 탓인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달려가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안은 채 회복문화대학사업, 학교생활, 자립생활센터 일을탓이었을까? 어떤 때는 동료들한테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아 자립생활센터 활동을 그만두고 싶다” 는 생각들이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았다. 한동안 의욕 없이 일을 하면서 내가 과연 자립생활센터에 있는 게 맞는건가? 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고민을 하던 중 자원봉사론 수업 시간에 자원봉사활동 영상을 보게 되었다. 동영상을 다 본 후 교수님께서이런 말씀을 하였다. ‘너희가 여상을 볼 때 가슴이 뭉클한 곳이 있다면 그 현장에 가서 일하는 것이 너희들의 미션이다. 그러면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내가 과연 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면서 가슴이 뭉클한 적이 있었던가?” 그 당시 가슴이 뭉클하게 느껴진 활동들이 떠오르지 않아 서 더욱 더 좌절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활동을 하던 중 회복문화대학의 어느 1강의 시간이었다.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 한 선생님으로부터 자립생활과 동료상담의 강의 중 한 동영상을 보여줬다. 그 동영상은 신체장애인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기 위해서 투쟁을 하였던 영상이었다. 그 영상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강의가 끝나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 내가 자립생활센터 활동을 하는 것과 회복문화대학을 진행하면서 동료들과 활동하는 것이 내게 의미가 있구나.” 내 인생의 미션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그 미션은 바로 동료들과 함께 정신장애인의 좋지 않은 인식을 바꾸고 지역사회에서 정신장애인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사회 환경을 바꾸는 것이었다.

나는 그 미션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활동을 하였지만,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그 위기는 바로 “겉멋”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 “겉멋” 은 평소에 그렇게 활동을 하면서 신체장애인 영역에서 장애인 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 우리 정신장애인들도 빨리그런 운동을 하길 바랬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당사자선생들을 보면, 답답하고 화만 냈던 것 같다. 그로 인해 한 후임은 당사자 활동에 경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인 활동을 비롯한 자신이 사진이 찍히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있어서 그런 활동을 하고 싶지 않다고 나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나는 그러면 한국정신장애자립생활센터에서 근무를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 생각 때문일지 몰라도 그 후임한테 화를 내거나 강압적인 모습으로 후임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렇게 관계를 맺게 되어서 그 후임은 나와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그 후임을 날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나와 잘 풀고 싶다고 노력을 하였고, 어느 날 한 프로그램 시간에 그 후임의 살아온 환경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그 후임의 부모님은 매사의 완벽한 모습을 가족에게 요구 받았고 절대로 정신장애인이라고 밝히면 안 된다고 강요를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때 그 당시의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 그 후임이 무언가 스스로 선택을 해본 일이 전혀 없었고 부모님의 억압을 받고 살아 왔구나!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평소에 스스로 일하는 것에 두려움과 매사 확인을 받아야지만, 안심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후임은 불안해서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그후임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그 후임을 어떤 일에 대해서 선택하고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기다려 줘야겠다는 생각과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그 후임과 저와 서로 노력을 하게 되어 관계가 조금씩 좋게 되고,그 계기로 다른 당사자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 전에는 그 사람과 관계를 맺이 않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 사람이 저렇게 밖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거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로 우리 동료들을 좀 더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나의 “겉멋” 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를 만들었고, 활동가들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고민을 너무 해결 하고 싶어서 해결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였고,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같은뜻음 품은 활동가들의 조직화하는 직업이 먼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 나는 점차 당사자 활동가들을 이해하려 노력했고소통의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서울시 지원 사업으로 13명(비장애인포함)의 활동가 같이 활동을 하고, 예전보다는 좀 더 체계적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지만, 나에게 가장 큰 위기가 찾아 올 줄은 몰랐다. 그건 바로 대표님께서 자립 활동을 그만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 이야기는 마치 암 선거를 받는 것처럼 큰 충격이었고 그 때 당시에는 정말로 대표님이 원망스러웠지만, 대표님이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왜 생겼는지 궁금해서 “대표님 왜 그만 두고 싶어 하시는 거예요?” 묻자 대표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제가 그동안 너무 활동을 하면서 너무 힘들었고 제가 계속 대표직을 하면 선생님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져요. 그리고 전 동료들을 위해 동료들에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전도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와 자립 활동가는 대표님을 차마 붙잡을 수 가 없었다. 왜냐하면 평소 대표님이 많이 힘들어 하시는 모습이 보였고 지속적으로 전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표님이 2017년 2월 17일 그만 두시고, 내가 대표를 맡게 되었다.

내가 아직 대표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13명의 가족 같은 활동가와 함께 의논하고 함께 고민하면서, 정신장애인들이 좀 더 교도소 같은 병원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회 환경을 바꾸는 활동을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엔 회복의 의미는 당사자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은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정신장애 쪽에 복지는 전문가들의 중심으로 되어있는 센터들만 있고, 정신장애를 대표성을 가질 당사자 단체들이 4군데 밖에 없는 것이 가장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로인해 내가 평소에 활동을 하면서 시행착오를 겪고 느낄 수 있는 기회조차 다른 당사자들한테 없다는 것이 가슴이 아프다. 앞으로는 조금 더 정신장애인 인식이 개선되어 당사자 단체들이 많이 생기고 재원을 지원받아, 당당하게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나는 현재 비장애인 친구들처럼 월급을 받지는 못하고, 가족들도 내가 살고 있는 생활을 만족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믿고 각 자의 여유 있는 생활을 아니지만, 서로 함께 의지하면서 13명의 활동가가 있기 때문에 제 통장에 몇천만 원, 있는 것보다 더 행복 하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앞으로 나와 13명의 자립 활동가, 수많은 정신장애인 당사자들 함께바꿔가야 할 세상이 있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고, 이 행복 삶을 끝까지 지키고 싶다.

  • 담당부서정신건강정책과

  • 전화번호044-202-3857

  • 최종수정일2023년 08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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