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상] 다르지도 틀리지도 않은 삶의 시간
- 작성일2017-07-14 14:08
- 조회수1,979
- 수상자정O진
<다르지도 틀리지도 않은 삶의 시간>
이 공고를 보면서 내 삶의 한자리에 서서 잠시 되돌아보게 되었다. 부산의 대학병원 현장에서 장기간 일하고 있는 정신보건사회복지사는 드물기에 학생이나 유관직종의 기관방문을 많이 받는 편이다. 그때 마다 꼭 받는 질문이 있다.“기억에 남는 환자가 누구입니까? 힘들었던 케이스나 보람 있었던 케이스는요?” 난 늘 그렇게 답한다. “없습니다. 모두 힘들었고 모두 보람되어 특정한 케이스는 없습니다.”물론 진짜 그렇지는 않다. 10살도 되기 전에 발병해서 성인을 바라보는 지금 나이에도 입·퇴원을 반복하고 있는 이도, 열심히 개입했음에도 매일 죽이겠다고 전화 오는 이도, 직업재활이 성공해서 고맙다고 첫 월급부터 지금까지 매년 선물을 보내주는 이도, 힘겹게 대학 졸업했다며 졸업장을 들고 와서 울고 간 이도, 우울증이 심해 자살시도해서 왔다가 암이 발견되어 경제적 자원을 연계했더니 살려줘서 고맙다고 멋쩍게 웃던 이도 기억에 남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대상자의 희비에 전문가 개인의 감정이 흔들리는 것은 소진에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의 희비에 함께 웃고 울 수 있지만 그것은 순간이어야 한다. 그들의 희가 나의 능력이라고 착각하지 말고 그들의 비가 내 책임이라고 비관해서는 안 된다. 그 누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모두에게 같은 결과를 주는 것은 아니다.’정신보건사회복지사로서 십 수년 을 일하면서 가지게 된 직업관 때문이다. 그런 그들의 인생을 비추어 내가 희비를 느끼는 것은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한사람의 이야기를 꼭 하고 싶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아마도 그녀도 나도 결혼을 하기 전이었던 것 같다. 조현병 진단을 처음 받고 치료도 꽤 성실하게 받아 소량의 약물도 충분히 잘 관리 되고 있었다. 첫 발병이고 조기치료와 성실한 치료 때문이지 호전도가 매우 좋았다. 구직활동도 잘 되어 독립취업에도 성공하였다. 가끔 직장 스트레스로 면담을 했으나 곧 일이 바빠지면서 주말 진료로 바뀌고는 자연히 사후관리도 종결하고 잊은 듯 살았다. 그러다 외래에서 의뢰되어 오랜만에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 직장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하여 임신을 위해서 약물을 임의적으로 끊었고, 환청이 심하게 들리면서 두통과 짜증이 심해지는 것을 보고 남편과 함께 내방했다가 임신 및 재활 관련하여 의뢰된 것이었다. “남편은 제가 아픈 걸 알지만 시댁에서는 몰라요. 시댁에서도 너무 원하고 저도 아기가 너무 갖고 싶어요. 제가 재발하는 것보다 아기가 기형이 되는 게 더 무서워서 약을 끊었어요...”말을 잇지 못하고 우는 그녀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임의적으로 약을 끊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찰나“제가 임신하고 싶은 게 욕심이에요? 제가 행복 하고 싶어서 얼마나 열심히 치료 받았는지 아세요? 선생님도 애 있잖아요. 선생님은 정상인이라 당연한 거고 나는 정신병자라서 안돼요?”그녀의 원망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삶의 주기마다 병의 난간에 부딪혀 그녀는 많이 지쳐있었다. 그리고 자녀를 갖고 싶은, 엄마가 되고 싶은 당연한 감정을 충분히 공감했기에 더욱 나의 마음이 무거웠다.
임신을 하게 되면 생길 수 있는 위험과 약을 잠시 중단하거나 변경해야하는 것, 자연분만이 어려울 수 있음과 모유수유는 할 수 없는 것 등 100% 보장할 수 없는 부작용등에 대해 주치의와 역할을 나누어 환자와 보호자인 남편에게 설명하고 선택할 것을 권했다. 그녀는 확고했다. 남편은 위험을 무릅쓰는 환자를 잘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의 의견을 따르겠다고 하여 주치의 및 산부인과 협진을 하며 임신을 계획하기로 하였다. 면담 내내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임신을 지지하면서도 지금도 안정적인데 굳이 위험수를 두어야 하나 하는 마음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나에게 나 스스로에게 실망감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하게 되었고, 초기위험을 낮추고자 약물을 거의 끊은 상태로 유지하기로 하였다. 역시나 증상이 다시 심해지기 시작하였다. 환청이 심해지고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며 하루 종일 남편에게 전화하고 밤에 오면 지속적으로 남편을 추궁하기도 했다. 주변 이웃들이 자신이 임신한 것을 질투해서 헤치려고 한다는 등의 관계망상과 피해망상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증상이 아주심한 상태는 아니었으며, 약을 쓰기에는 너무 초기라 덜 위험한 시기까지 2주 만 버텨보기로 하고 몇 가지 행동계약을 했다. 남편에 대한 의심이 들면 직장에 가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1분 이하의 짧은 통화하여 안심하기. 불안하거나 감정의 기복이 생길 때는 일상생활 속에서 전환활동으로 사고 중단하기. 환청이 들릴 때는 태교음악을 듣거나 친정식구에게 전화하기. 이웃들과도 교류를 잠시 중단하고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을 집으로 오라고 해서 시간을 보내기. 2주간은 주1회 내방면담을 실시하고, 매일 2번씩 짧은 전화 상담을 실시하였다. 증상도 심해지지 않았고 남편도 환자가 직장으로 전화를 하지 않자 그 외 시간은 전화를 잘 받아주게 되면서 환자의 심리적 안정감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아기를 가져서 인지 아니면 아내가 저를 보면서 회복하려고 애쓰고 실제로 제가 잘하니까 아내가 좋아지는 걸 보고 제가 더 잘하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가정이되어가는 것 같아요.” 그들에게 회복 탄력성이 보였다. 약 없이 2주를 잘 보내고 치료진 회의를 통해 임신시기에 증상이 악화 될 경우 자해나 자살 등으로 태아를 위험하게 만드는 다양한 행동을 할 수도 있음을 안내하고 나름 임신 시 사용할 수 있는 안전한 약을 저용량으로 유지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환자와 보호자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고, 초기에는 입원치료를 하기로 하였다. 매일 불안 해 하면서도 강한의지를 다지는 그녀의 변화는 치료진도 힘나게 하였다.
수없이 많은 치료진 회의를 하였다. 회의 이후는 늘 환자의 남편과 어머니에게 진행과정과 결과를 알려주며 함께 걱정하고 불안해할 가족들을 안심시켜주는 것과 인터넷에 떠도는 부정확한 정보로 부터를 정확하게 정정해주는 일을 하였다.
환자도 증상이 완화되면서 병동 요법을 전부참여하며“이게 태교라고 생각해요... 미술 음악, 종이접기, 거기다 자아성장 훈련에 대인관계훈련까지.... 우리 애는 다재다능할 것 같아요.”그녀의 말과 웃음에 내가 안심이 되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나를 반기는 두 아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눈물을 흘렸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삶의 과업들이 그녀에게는 자신의 인생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치열한 과정임에 마음이 아프고... 당연하게 영위하는 내가 미안하고.... 그 속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찾아가는 그녀가 대견하고.... 내 아이들이 고맙고...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잠기 헤맸던 것 같다.
어느 정도 안정기를 찾아갈 때쯤 갑자기“선생님 어제 아기가 기형아로 태어나는 꿈을 꿨어요. 제가 괜히 욕심 부려서 아기가 태어나서 세상 살기 어려우면 어떻게 해요. 저처럼 되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잘 이겨내고 잘 지내는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 지지하자 “저 일하면서 진짜 힘들었거든요. 학원이니까 저녁일이 많아서 생활리듬도 안 맞고.... 수강생이나 원장쌤 땜에 스트레스 받을 때는 재발 할까봐 약을 진짜 열심히 먹었거든요 그런데 약을 먹다가 다른 쌤들이 알 것 같고, 다른 쌤들이 뭐라 하면 내가 정신병자라서 무시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혹시나 탄로 나면 쫓겨날까봐 더 열심히 일하고... 하루하루 신경이 닳는 느낌이었어요.” 더 이상 “잘하고 있어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던 같다. 내입에서 나오는 어떠한 말도 부적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대신 본원 낮병원에 25년 전 발병하여 대학생 딸을 키우고 있는 회원에게 동의를 구해, 단기간이지만 멘토의 역할을 부탁하였다. 그녀가 안정감을 찾아가는 것이 보였고, 내가 줄 수 있는 답보다 경험이주는 더 좋은 답을 가진 이가 있음에 감사했다.
일전에 낮병원에 회원들에게 성공경험담 강의를 해준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는 환자분의 이야기가 언뜻 생각났다. “남들이 잘한다 잘한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많이 힘들어요. 그래서 일 안하고 싶냐? 아니요 그러면 저는 그냥 환자잖아요. 하지만 제가 일을 하면 저는 수석 바리스타예요. 그리고 주변사람들도 환자인데도 일을 이렇게 잘하네 하고 더 잘 봐주더라고요.”그랬다. 병이 호전되고, 취업도 하는 등 치료와 재활에 있어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던 그 순간에도 그들은 병과 편견과 처절한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재활하는 것이 진정으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그들과 함께 나와 사회, 국가가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하면서 무거운 마음을 사명감이라는 무게로 조금 옮겨보았다.
몇 일 후
“아기 심장소리 듣고 저희 부부 둘이서 바보처럼 울었어요. 그냥 그냥....선생님 저도 엄마가 되는 거죠.... 될 수 있죠? 아기 임신하게 되면서 진짜 아내가 된 것 같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있는 것 같아서 행복해요. 저 잘 할 거예요. 저 악바리 같은 근성도 있고, 또 생각 없이 긍정적이거든요. 그래서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안될 때는 도와주세요. ”그들이 한걸음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퇴원을 계획하면서 보건소자원을 연계하여 산모교실과 관련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해당 구의 정신건강증진센터와 건강가정지원센터에 연계하여 지속적인 상담과 가정방문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만삭이 되면 다시 약을 잠시 중단해야 해 입원치료를 해야 하지만 환자나 보호자가 너무 잘 지내고 있어 일단 외래로 지켜보기로 하고 정신건강증진센터선생님이 주1회 가정방문, 건강가정지원센터 지지리더가 주1회 가정방문상담, 주치의 외래치료1회, 나와의 상담1회, 산부인과 산모교실1회로 다양한 세팅의 전문가로 분산하여 집중케어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출산 후에도 신생아를 돌보는 과정에서 그녀가 출산과 양육의 스트레스를 적게 받게 하기 위해 첫 한 달은 국가지원의 산후 도우미를 연계하였고, 이후 건강가정지원센터를 함께 연계하여 아이 돌보미 사업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또 남편의 학원 강사수입이 일정하지 않아 저소득에 속해서 환자가 조현병이라 분유지원금액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환자와 남편이 “국가가 이렇게 많은 것을 저희한테 해 줄 수 있는 줄 몰랐어요. 진짜 고맙네요. 저희 잘 살아야겠어요.”그녀 역시“사실 제가 너무 원해서 애기를 가졌지만 막상 출산하려고 하니 걱정이 앞섰는데 이렇게 하나하나 해결되니까 너무 마음이 편안하고 좋아요.”하며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수술 날짜를 받을 상태에서 먼저 양수가 터지고 분만진행이 빨라지면서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낳았다고 연락이 왔다. 눈물 콧물을 흘리며 이야기하는 그녀와 함께 울면서 웃고 있는 남편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사실 진정 감사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그녀의 삶의 옆자리에서 나는 성장하고 있었다. ‘제도화 되지 않았다고 실천하지 않으면 절대 제도화 되지 않을 것이고 그 손해는 나의 대상자가 받는다’는 실천의지를 가지고 행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토대로 정신질환의 재활과 그 의미 나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사례관리하면서 안타까운 것은 정신과 환자는 분명히 고위험 산모임에도 고위험 산모 대상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임신초기와 말기 혹은 저용량으로 조절 되지 않을 때는 입원치료를 해야 하고, 산부인과와 정신건강의학과가 함께 있는 종합병원 이상의 병원치료비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경제적인 지원이 되는 제도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또한 정확한 매뉴얼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임신환자가 많았고 그때마다 치료진 회의를 하면서 필요성을 느꼈다. 정신질환의 치료법이 향상되고, 다양한 재활의 결과로 이제는 정신장애인의 가정, 성, 임신과 출산, 양육에 있어서 환자와 가족에게 제대로된 정보와 교육을 할 수 있는 자료, 지침서 매뉴얼에 대한 개발의 필요성을 느꼈다.
아이의 백일 떡을 가지고 와서 내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는 “이제 뭐든 해보려고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이 때문도 있지만 아이를 가지고 낳는 과정에서 사실 저도 많이 단단해지고 남편도 많이 단단해 졌거든요. 뭔가 모르지만 제가 변한 것 같아요.”그녀의 그 자신감 있는 미소는 어떤 수식어가 필요 없는 그저 그녀의 것이다.
장애인의 재활의 목적은 그들이 사회통합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으면서도 그 사회에 나름 정상화의 원칙아래에서 융합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그 결실들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노력에 도움이 되고자 나 역시 부단히 노력할 것임을 다짐했다. 아마 그냥 흘려보았을 공고에 이글을 쓰는 것이 나의 노력의 첫걸음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삶이 정상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삶과 틀리지도 다르지도 않다. 그렇기에 그 삶의 무게역시 더 무겁지 않기를 바라며 그들의 삶의 무게를 덜기 위해 혹은 삶의 무게를 잘 견디게 하기 위해 나는 노력할 것이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또 다음 삶의 고비를 위해 나아갈 것이다. 그 삶의 여정에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큰 희망과 위로가 된다. 이 글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지만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갖고자 하는 또 다른 이들에게 희망과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